Silverwolf's Daily Record

은빛늑대'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구두를 샀다.

잡문 2008/03/04 21:48 by 은빛늑대

때마침 아버지로부터 상품권도 받았고, 이제 슬슬 바꿀 때가 되었다 싶기도 해서, 시장에서 산 2만 원짜리 싸구려 신발 - 그래도 무려 2년 동안이나 잘 신었던 - 을 버리고 새 구두를 한 켤레 샀다. 물건을 보는 눈이 워낙 까다롭다 보니, 옷가지 따위를 살 때는 항상 이 가게, 저 가게를 전전하며 기분만 나빠지곤 했었는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모처럼 마음에 쏙 드는 구두가 처음 들어선 가게의 진열장에서 반짝이고 있었더랬다. 그래서 냅다 신어 보기는 했는데, 글쎄, 원래 발이 작은 편이기는 했지만, 그 구두는 평상시에 신던 것보다 두 치수나 더 작은 것을 신어야 했다. 그러나 디자인이나 색깔, 만듦새 등이 내가 생각했던 것에 꼭 들어맞았기에, 나는 조금 딱딱한 가죽과 애매한 치수에 대한 불안감을 뒤로하고서 그 구두를 신은 채 거리로 나섰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경사진 길을 걸을 때마다 복사뼈가 아프긴 했지만, 가죽이란 것이 원래 어느 정도 길이 들어야 차츰 편안해지게 마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랬다. 그렇게 불편한 신발을 억지로 열심히 신고 다니다 보니 절로 물집이 잡혔다. 아는 사람들은 안다. 심각한 부상보다도 오히려 손가락 사이에 난 뾰루지, 종이에 베인 곳, 발바닥의 물집, 여드름이 터지는 것 등의 사소하고 시시껄렁한 상처들이 더 아프고 신경이 쓰인다는 것을. 걸을 때마다 따끔거리고, 진물이 나 양말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종일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통학 때문에라도 매일 한두 시간씩은 걸어야 하는 나에게는 정말로 짜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발에 잘 맞지 않는 신발만큼 사람을 좌절하게 하는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발이 닿는 대로 어디든 걸으며 무엇이든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렇게 느껴진다. 스쳐 지나가는 세상을 눈에 담기도 바쁜 마당에, 별것도 아닌 통각에 신경이 쓰여 자칫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노릇인가 말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오늘 아침에도 나는 예전처럼 밖으로 나가 강아지같이 뛰어다닐 수가 없었다. 발이 아파서, 그리고 온 마음으로 기뻐할 수가 없어서였다. 저녁 즈음에 눈이 다 녹아 처마 밑으로 흘러내릴 때, 나는 그 하얀 풍경 속에서 하나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어쩌면 거치적거리는 육체를 걸친 자의 한계라는 것이 아마 그런 것일 테다.

이기적인 소리지만, 이제 나에게는 D 역시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몸과 마음에 맞지 않아 불편한 사람. 그가 나를 기다리는 것이 싫어지고,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싫어지고, 전에 그랬듯 나를 소유하거나 지배하려 드는 모습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언젠가는 결국 그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 꼴도 보기 싫어질 것임이 빤한, 어떤 환멸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내 경험상,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연애는 언제나 셋 중 하나의 결론으로 끝나게 된다. 첫째, 결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거나, 둘째, 그저 좋았던 시절의 추억으로만 오래도록 남거나, 셋째, 그토록 사랑했던 상대방을 철천지원수로 삼게 되거나. 지금과 같은 관계가 계속된다면, 우리가 맞게 될 파국은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보다 더 어렸던 시절, 사랑은, 연애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단지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도, 혹은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에게 충만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게끔 하는 관계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나의 연애와 상대방의 연애는 서로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발에 맞지 않는 신발과 같이, 서로 맞지 않는 마음은 마찰과 상처만 남길 수도 있다는 것을.

2008/03/04 21:48 2008/03/04 21:48

TRACKBACK :: http://dsc0320.ivyro.net/tatter/trackback/1578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1  ... 8 9 10 11 12 13 14 15 16  ... 1408 

공지사항

달력

«   2009/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카테고리

전체 (1408)
잡문 (1262)
음악 (117)
책 소개 (29)
textcubeDesignMyselfget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