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은 그간 글이 뜸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심리적으로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게 되면, 나는 매우 침착해진다. 생일을 며칠 앞두고 있었던 운명적인 그날도 나는 전에 없이 침착했다. 강력계 형사라는 그 사람과 이따금 농담까지 주고받았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몹시 지쳐 있었고, 차츰 엄습해 오는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겨우 두 평 남짓한 내 방에서는 너무나도 평범한 발자국 두어 개 외엔 절도범에 대한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군더더기조차 없는 깔끔한 솜씨 - 오직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만 챙겨서 순식간에 달아난, 게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쉽게 의심하지 않도록 문까지 도로 잠근 - 에 오히려 내 쪽에서 감탄할 지경이었다. 이젠 영영 잃어버린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돌아간 후, 텅 빈 책상 앞에 한동안 망연자실한 채 앉아만 있다가, 어느 순간엔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던 것 같다. 문득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허탈한 나머지 반쯤 젖은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그냥 방을 나섰다. 계속해서 좋지 않은 생각들만이 떠올라 가슴이 탔다. 사진으로 남아 있었던 추억들도, 울적하거나 답답할 때마다 마음을 달래 주었던 나만의 노래들도, 모아 두었던 글감들도, 그에 대한 자료들도 못내 아쉬웠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게 만든 것은 바로 나의 첫 번째 소설을 어이없이 잃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애당초 목표로 삼았던 것은 300여 페이지였다. 그리고 나는 지난 한 해 동안에 150여 페이지를 썼다. 참으로 뜨거운, 그리고 무거운 나날들이었다. 때로는 아무리 해도 다음 문장이 떠오르질 않아 자신을 학대하기도 했고, 때로는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한 상태로 무심히 몇 페이지를 써내려가기도 했던, 나에게 있어서는 단지 ‘나의 첫 소설’이라는 것 이상으로 크나큰 경험적 - 작가로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작품이었다. 거기에 바친 시간과 열정을 어찌 값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을 어찌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있으랴.
그 때문에 나는 한동안 글을 쓰기는커녕, 글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냈다. 컴퓨터 도난 사건을 필두로 해서 자꾸만 나쁜 일들이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의욕은 조금씩 시들어 갔다. 그 와중에 어설픈 담배 실력만 자꾸 늘었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더라면 작가보다 폐병쟁이가 되는 것이 훨씬 빨랐을 것이다. 의욕을 되살린 것은 그토록 싫어했던 과제였다. 한 주에 두서너 개의 과제를 해내려면 억지로라도 정해진 책을 읽어야만 했고, 또 어떻게든 글을 써야만 했다. 놓았던 펜을 다시 쥐는 것은 적잖이 괴롭고 힘든 일이었지만, 가족들이 나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를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소설은 처음부터 다시 쓰기로 결심했다. ‘세상에 내놓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작품이라 하늘이 만류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사람은 좌절을 겪으면서 성장한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이번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은 그야말로 내 생애 최초의 좌절이었다. 장차 그만큼의 성장이 있기를 바라며, 이제 다시금 꿈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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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심이 크시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경험이 늑대님에게는 또 다른 경험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물질적 소실은 크나큰 피해이긴 하지요..)
2008/04/17 17:49하드포맷과 비견할 일은 아니지만, 게임기획자.. 지망생인 저로서도, 가끔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예전엔 컴퓨터 텍스트파일로 저장하곤 했답니다. 그러다가 불의의 일로 하드 포맷으로 다 날려버리고는, 그 뒤론 종이와 텍스트파일 두가지를 연계해 가며, 제 생각을 남기고 있습니다. 중요한건 꼭 종이로 남기기도 하고, 텍스트파일로 남기는것은, 블로그나 웹계정을 빌려 만든 게시판에다 자신만 알아볼수 있게 올려서 꼭 이중으로 기록을 남겼지요.
지금은 가끔 그 아이디어가 떠오를랑 말랑 합니다만, 사실 지금으로써는 그때의 잃어버린 그 아이디어보다, 현재의 구축중인 아이디어가 더 소중하기도 하고, 그때의 아이디어를 지금이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며 그냥 지나가버린 시간과 제 변화에 대한 감정만 떠오를 뿐이더군요.
그간 쓰시던 글의 줄거리라도 생각나는대로 따로 적어 놓으신다면, 훗날 방을 정리하다 그 내용을 보며, 새로이 글을 쓸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군요.
그나저나 글을 보는 저도 굉장히 황당하네요. 다른건 다 제쳐두고 컴퓨터만 훔쳐가다니.. 확실히 요즘 컴퓨터는 작고 들기 편해서 다른 가전제품에 비해 장물로서 좋은 소재이기도 하지요. 전문털이범인것 같군요. 용산이나 컴퓨터 중고매장을 중심으로 장물조사를 하다보면 걸릴지도 모르겠군요. 아무쪼록 좋은일이 있길 바랍니다. 컴퓨터를 되찾는 일, 혹은 글에 대한 새로운 도전욕구라던지로..
지금은 포기하다시피 한 상태입니다. 지금 와서 찾는다고 해도 너무 늦었네요. 경주에서 훔친 물건이 용산까지 가진 않았을 것 같구요...
2008/05/28 19:32RSS리더에 글이 안 보여서 들어와 봤더니.. 이구...
2008/05/04 13:20올 한해 액땜 제대로 하셨군요.. :)
그렇지만도 않네요. 나쁜 일이 자꾸 생겨요.
2008/05/28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