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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짝사랑 중독.

잡문 2007/01/07 16:30 by 은빛늑대

새하얀 종이 위를 내달리던 연필은 불현듯 수줍기라도 한 듯이 우물거리더니, 다시금 아주 부드럽고 느리게, 그러나 자못 진지하게 '사랑' 이라는 낱말을 그린다. 마치 볼 위를 기어 가는 달팽이와도 같이 간지럽고 촉촉한 기분으로, J는 자신이 적은 '사랑' 이라는 두 글자를 내려다 보면서, '언어란 참 신기하기도 하지. 이렇게 글로써 적어 놓고 보니까, 정말로 그가 없으면 죽고 못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 라는 생각을 하며 애달픈 한숨을 토했다. 갓 스무 살이 된 그녀에게 있어서, 첫 사랑은 너무나도 어려운 숙제이자, 한 편으로는 신기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다.(그렇다. 누구나 한 번 쯤은 타인에 대한 새로운 감정에 놀라서 설레는 가슴을 뒤척이거나, 이유도 없이 젖어 드는 눈시울을 비비며 밤을 지새웠던 적이 있었으리라.)

L을 알게 되고, 또 사랑하게 된 이후로, J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라는 일이 잦아졌다. 친구들로부터도, 심지어는 스스로로부터조차도 무뚝뚝하다고 여겨져 왔던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런 그녀의 가슴 속에도 '사랑' 이며, '인연' 이며, '끌림' 따위의 낯간지러운 낱말들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깨끗하게 씻은 후, 그리 두텁지 않은 화장을 하고, 약간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는 J 자신의 모습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고,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한 층 더 성숙한 여인이 된 -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만큼은 그렇게 느껴지는 - 스스로를 무척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것이 '짝사랑' 이라고 해도 말이다.

솜사탕 같은 마음이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를 수록, 어떤 불길한 예감 또한 그와 함께 깊어져 가고 있음을, 그녀는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그것은 매우 복잡한, 환희와 절망이 뒤섞인 토악질 같은 감각의 산물이었다. 그녀는 불안했고, 기대에 차 있었고, 두려웠고, 석연찮았다. 자신의 사랑이 선한 바람을 타고서 L의 귓가에 닿기를 바라는 한 편, 이대로 어디론가 영영 사라져 버려서, 이 간지러운 마음은 영원토록 고스란히 자신의 가슴 속에다가만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는 요사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아니, 그녀는 차라리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L이 J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하기를, 그래서 그와 그녀가 '연인' 이라는 이름의 관계로 이어지지 않기를 원했다. 그녀는 스스로의 기이한 태도에 당황했으나, 그 원인은 찾지 못 했다.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과연 그녀가 사랑에 빠진 대상이 정말로 L인지, 아니면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의 모습인지를, 가질 수 없는 것들만을 동경해 온 그녀로서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짝사랑이야말로 그녀의 영혼을 풍요롭게 할 '빛과 소금' 임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그녀 뿐이었다.

2007/01/07 16:30 2007/01/0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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