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 마침내 성적표를 확인한 이후, 나는 약간의 실망감에 잠긴 채로 적막한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우려했던 것 보다는 나은 편이라지만, 성적이 좋지 않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연한 결과다. 필요한 만큼의 노력을 다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나는 나 자신의 고질적인 게으름을 원망하고, 후회하고, 뉘우치고, 반성했다. 그러면서 한참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이 참으로 멀고도 험난하게 느껴졌다. 이토록 훌륭한(?) 성적표를 부모님들께 당당히 내밀 수 있는 자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미 몇 번이나 걸어 보았던 길을 다시금 걷고, 또 걸었다. 잠을 못 잔 탓에 머리가 아팠지만, 나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과, 장차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에는 충분했다.
그런 고민들을 거듭하면 할 수록, 십 수 년 전의 과거, 세상의 만사가 마냥 즐겁기만 하던 그 시절이 점점 더 그립게 느껴졌다. 하루 종일 뛰어 다닐 만큼 건강했고, 이 세상의 다른 누구를 부러워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행복했고, 좋은 꿈 같이 푸근했던 나날들이었다. 물론, 무슨 수를 써도 돌아 갈 수 없는 과거라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그 시절과 그 시절의 추억들에 대한 그리움 만큼은 도저히 지울 도리가 없었다. 그 때문일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수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살았던 바로 그 동네로 말이다. 대신동에서 보수동까지, 차를 타고서는 고작 10여 분 정도 밖에는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걸어서는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그 길을, 나는 지치지도 않고 잘도 걸었다.
17년, 강산도 두어 번은 족히 바뀌었을 세월 동안, 보수동은 참 많이 변했다. 우리 가족들이 살았던 집은 아예 골목 째로 사라져 버렸고, 새롭고 큰 건물들이 그 자리를 대신 메꾸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그 거리의 풍경들과 함께, 그 시절의 추억들도 송두리째 씻겨져 나간 것만 같아서였다. 그래도 인상은 남아 있었다. 우리 집을 찾는 기준점이 되곤 했던 식당, 국세청, 담쟁이가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작은 건물, 간판만 새 것으로 바뀐 낡은 구멍 가게... 그들은 여전히 그 동네를 추억의 장소로서 지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았을 때에는 왠지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절의 내가 현재로 날아 온 듯 한, 지금의 내가 그 시절로 돌아 간 듯 한, 그래서 나의 과거와 현재가 이 자리에서 교차하고 있는 듯 한, 그런 느낌이었다.
이 세상의 어딘가에는 수고롭게도 자신을 유지하고, 지키고, 보존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들은 그들을 통하여 우리들의 과거를 본다. 하루 사이에도 세상이 바뀌곤 하는 지금, 나는 이렇게 변하지 않고서 남아 있어 준 존재들이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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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살던 아파트가 공원이 되어 있을 때의 그 착잡함이란...
2006/12/17 23:35저희 집은 도로가 되어 있었답니다. -_-;
2006/12/18 13:43공원 정도면 그나마 긍정적인 변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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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8 18:25감사합니다. :)
2006/12/19 16:20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드는 생각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왜 좀 더 일찍 알 수 없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감할 수 없었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실들을 좀 더 일찍 받아들일 수 있었더라면, 나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을 좀 다르게 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쉽게 말해, 어른들이 하기에 무시했던 그 말들을 왜 조금 더 깊이 고려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루소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말했듯, 어떤 사실을 깨닫고 나면, 이미 그 사실을 이용할 시기가 지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죠. 너무 빨리 인생/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2006/12/18 22:17세상 일은 뭐든 겪어 봐야 안다는 말도 있지요. 미래를 내다 보지 못 하는 이상에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요? :) 가끔은 지금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과거로 돌아 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예측할 수 없기에 삶은 스릴있지요.
2006/12/19 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