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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되기.

잡문 2007/03/08 16:03 by 은빛늑대

입력된 번호를 저장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절대로 믿을 수가 없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여자에게, 그것도 우러러 보아야 할 만큼 예쁜 여자에게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핸드폰 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라니, 언제나 '소심하고 가녀린 사람' 이라고 나 자신을 표현해 왔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감히 함부로 상상할 수 조차도 없었던 말이다. 어쩐지 부끄러워 보이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 보면서 나는 참 많은 생각들을 한다. 이것이 바로 대학 문화란 말인가, 나도 이제 대학생이란 말인가, 나에게는 이미 차고도 넘치는 애인이 있는데 과연 이렇게 행동해도 괜찮은 걸까, 혹시 흑심을 품었다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저녁께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어떤 인간 관계에 대해 이토록이나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내가 할 일' 이 아닌데, 나는 그것을 의외로 잘도 해 내고 있었다. 이름이 무어냐, 나이는 몇 살이냐, 그러면 당신이 선배다, 누나라고 불러도 되겠느냐, 시간 있으면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자, 식후에 캔 커피 하나 정도는 내가 사겠다... '나' 답지 않은 이야기들이 바로 '나' 의 주둥이에서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아닌 나에게 제법 호감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러자 나는 그만 슬퍼졌다. 그녀가, 사람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나의 모습은, 사실은 내가 사랑하며 만들고 지켜 온 내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외로움에 지쳐 쥐어 짜듯이 만들어 낸 '붙임성이 좋은 나' 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조금 소심하기는 해도, 지내다 보면 꽤 괜찮은 녀석인 진짜 나를 알아 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은, 적어도 여기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두려워졌다. 나 답지 않은 나로서 오랜 시간을 계속 둔갑해 있다 보면, 제 목소리를 잊어 버린 새처럼, 언젠가는 답지 않은 그런 모습이 언젠가는 나의 진짜 피부로 변해 버리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쩌면 사람들은 다들 자신만의 가면들을 두서너 개 정도씩은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가장으로서의 나, 주부로서의 나, 전문가로서의 나, 학생으로서의 나, 기타 등등, 우리들이 이 사회 속에서 취해야만 할 자격들, 혹은 역할들은 너무나도 많아서, 다만 하나의 얼굴만 가지고서는 그 모든 자세들에 가장 절묘하게 대처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종종 '답지 않은 나' 의 모습에 서글퍼 하면서 산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는데, 내 진짜 마음은, 속내는...

다른 사람 되기, 그것은 참 현대적이고 슬픈 일이다. 마치 존 말코비치가 되고 싶어 하는 존 쿠삭의 한 마디, "자의식이란 무서운 재앙이거든." 라는 그 이야기처럼.

2007/03/08 16:03 2007/03/0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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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데굴대굴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속고 속이는게 인생사 아니겠어요. 나이가 들면서 진정한 친구를 찾기 힘들어진다는 말.... 이 말에 동감하면 대인관계를 깨닫기 시작하는거라고 하더군요.

    2007/03/08 17:01
    • 은빛늑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릴 때에야 바라는 것 없이도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나이를 먹다 보면 그렇게 되지는 않으니까요. 받고 싶은 게 있으면 줘야 하는 것도 있게 마련이고, 그러면 진짜 서로 좋아서 친구가 된다고 하기는 어렵죠.

      2007/03/11 12:49
  2. 고민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끔 네 사는 이야기 여기서 보곤 한다
    문학 전공하는 거니?
    자주 들리마 좋은 글 많이 볼께

    2007/03/08 17:45
    • 은빛늑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직 전공은 아닌데 곧 할려고...
      그나저나 반갑다. 연락 좀 자주 해라. ㅋㅋ
      내가 원래 먼저 연락 잘 안 하는 놈이라는 거 알면서~

      2007/03/11 12:50
  3. Tumnaselda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면을 쓰고 살다 보면 어떤 게 자기 얼굴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제 가면을 제 얼굴로 삼고 살고 있죠... 으음-_-;;
    그 가면, 아무래도 얼굴에 찰싹 달라붙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2007/03/08 19:08
    • 은빛늑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게 됐을 땐 차라리 진짜 모습을 잊어 버리는 게 편할 거예요.

      2007/03/11 12:51
  4. zizim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름 가면을 쓴다고는 하지만 어설픈 모양인지 어느날 "가면 좀 쓰고 살아라."는 충고를 들었습니다...orz

    2007/03/1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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