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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순수의 끝.

잡문 2008/06/11 16:41 by 은빛늑대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지난 7년간, 온 마음으로 외롭게 사랑해온 사람.
누구를 만나건, 누구의 품에 안기건
언제나 내 순수의 끝자락에는 그 여자의 모습이 있었다.

한때 우리는 연인이었다.
어린 시절이었고, 또 그만큼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비록 짧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사랑은 진실이었으며,
마치 얼음처럼 투명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졌을 때, 나는 깨달았다.
앞으로의 내 기억은 영원히 그 순간에서 멈추게 될 것임을.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리석고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는 얼간이였다.
다만, 더 나은 사람을 만나면 그녀는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럴 자격이 있는 여자였다.
그렇게 사랑했다.

헤어지고 나서는 한동안 연락을 끊었더랬다.
그대로 유야무야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하루, 하루 지내다가는
서로에게서 흐려지고 말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잠깐 이러고 나서 적당한 때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가가면,
그러면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친구로라도 남아 그녀의 행복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 잠깐이 한 해가 되고, 또 두 해가 되었다.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괜찮은 것 같았다.
헌신적인 사람을 만나서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행복하면 나도 마냥 기쁠 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녀의 연인과 함께 보낸 시간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울었다.
그녀의 얼굴과 눈빛이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고
잊으려 애썼던 사랑은 다시 달아올라 온 마음을 까맣게 태우는데
갈 곳 없는 열정은 자꾸만 슬픔과 질투로 옮아갔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죽을 만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내 사랑을 고백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이별과 상처 속에서 괴로워할 때,
또 다른 누구와 사랑을 하다가 마음을 다쳤을 때,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았던 것은 왜였을까.
거절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망설이고 흔들리는 사이에도 그녀는 자꾸만 달라져갔다.
아프고 슬펐지만, 그녀는 여전히 예전처럼 그녀였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예전에 사귀다 헤어졌던 사람과 다시 만나 결혼하겠다는 말을 들은 날은
그대로 세상이 끝나버리는 줄 알았다.
마치 취한 듯이 어지럽고 구역질이 치솟았다.
그녀는 사랑을 하고 있었고, 나는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였다.
그 사실이 나를 더더욱 미치게 했다.
그녀가 안고 있는 분노와 슬픔, 아픔과 두려움 따위를 알고 있었기에
도저히 아무 이야기도 해 줄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결정이 옳은 것이기만 바랐다.
그녀는 행복해야만 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나는 노력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녀를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를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난 7년간, 그녀의 고통마저 내 것처럼 느끼며 사랑했다.
그녀가 행복해 보일 때면 나는 산산조각날 것처럼 아파도 기뻤다.
그것은 내가 간직해온 최후의 순수였고, 청춘과 정열의 상징이었다.
사랑으로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고,
사랑으로 나는 내 안에서 한 줄기의 밝은 빛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내 사랑은,
전에도 없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없을 내 인생 최후의 사랑은,
영원하되 단지 추억으로만 남겨졌다.

2008/06/11 16:41 2008/06/1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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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xizang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첫사랑은 아니실지도? 글에 그런 언급은 없는지라)
    사람의 감정이 칼로 무 자르듯 똑똑 나뉘는 것이 아니라더니 정말 그런가봐요. 미우면서도 사랑하고, 아픈데도 행복하고..

    잘 지내시나요? 오랜 기간 새 글이 올라오지 않아 아쉽네요.

    2008/07/06 10:58
    • 은빛늑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첫사랑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의미가 있는 관계였고 또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요즘은 지내기가 참 어려워요. 괴로운 일이 너무 많네요.

      2008/08/10 13:53
  2. Rhia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찌보면 영원하되 단지 추억일 뿐인게 차라리 나을수도 있다는거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너와 같은 방식으로 과거를 보지 않을거란 생각은 하지 마, 같이 보낸 시간을 추억하는 방식은 같을 수 밖에 없는거니까
    이건 사실 정말로 신기한 일이지 언제나 기억에 남는 감정은 가운데를 잘라낸 것처럼 마지막과 처음밖에 기억나지 않으니까. 무슨소린지 알겠죠
    하고싶은 말들이야 추억이나마 곱씹었던 시간들에 대보자면 어찌 이런 글 한토막에 다 남길 수 있겠냐마는 적어도 오심즉여심이라, 한마디로는 요약할 수 있으리라.
    적어도 나는 이게, 그리고 그게, 유치한 말로 마지막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인연의 끈이, 열네살과 열여섯, 그런 인연의 끈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끊어질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해왔고 생각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생각하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가 소중한 추억까지 갈기갈기 찢어 버릴 이유는 못 된다고 생각한다는거지

    2008/07/26 12:40
    • 은빛늑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 우리 정말 오랜만이다.
      블로그에서 만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제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다 보니 지나갔던 사람이 되돌아가는 것도 보게 되는구나.
      언제고 부산 들를 일 있으면 블로그 통해서 연락해라. 아니면 칼루토한테 물어보든가.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얘기하자.

      2008/08/1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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