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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귀결.

잡문 2007/12/28 16:13 by 은빛늑대

D가 샤워를 하는 동안, 나는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워 몽롱한 기분으로 푸른 아침에 물든 회색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토록 잔인하게 가슴을 할퀴어 놓고서도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에 나오는 ‘현금’이 그랬던 것처럼 - 그를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나를 맞이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은 그 정도로 넉넉하고 관대한 남자라는 듯이, 조금은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는 꼭 꿈결처럼 달콤했다.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어디론가 나가고 없었다. 아마도 일 때문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크리스마스나 추석, 설날 등, 남들이 쉬는 날이면 그는 더더욱 바빴다. 끝난 뒤엔 홀로 남겨지는 것마저도 예전과 같아서 나는 쓸쓸했다. 맥 빠진 걸음으로 걷는 거리는 온통 반짝이는 전구들과 연인들, 그리고 행복으로 가득했다.

열두 시가 넘어서야 겨우 전화를 받았다. 메모도 없이 남겨두고 나가서 미안하다고, 그래도 다시 시작해 보자고 하는 그의 말이 귓전에서 마냥 맴돌기만 했다. 차마 알았다는 말도, 반대로 그냥 하루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취해서 즐긴 것뿐이라는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침묵을 지키는 동안에 그는 이미 모든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이미 나에게는 무어라고 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상황은 가끔 이렇게 귀결되곤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댔던 일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리기도 하고, 마음에도 없었던 것이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되고 나서부터는 진심인 양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의외성은 우리의 인생에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단지 한 덩어리의 삼킬 수 없는 불편함에 지나지 않는다.

2007/12/28 16:13 2007/12/28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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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stello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읽고 싸한 맘으로 스크롤바 내리는데... 징하네요. 마르신 분 뭐 더 뺄 게 있다고... 이래서 정말 단 한 명이라도 낚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니까요.

    2007/12/28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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