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박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터키 풍의 푸른 접시와 눈이 부실 만큼 새하얀 식탁보가, 어둡지만 고전적인 색채의 낡은 촛대 아래에서 흐리게 일렁이며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진다. 어느 곳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귀족적인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선화는 그 모든 것들이 참으로 지겹고, 또 숨이 막힐 만큼 답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너무나도 완벽했다. 심지어는 불만을 가질 여지조차 없었다. 남편은 굴지의 대기업에서도 상당히 높은 직위를 꿰차고 있었고, 남성으로서의 매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노력했으며, 조실부모(早失父母)한 탓에 가족을 소중하게 여겨 아내인 선화에게 헌신했다.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선화는 자유로웠지만, 그 얽매일 것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선화에게는 오히려 무거운 족쇄와도 같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하고 있었다.
선화가 진호를 만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는 '팔리지 않는' 책을, 그나마도 이따금씩 마음이 내킬 때나 써 내곤 하는 한가한 작가였다. 일곱 평짜리 작은 방에 앉아서 그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했고, 거대한 자연의 경이에 감탄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솔직하지 못 했고, 사람들은 그의 책을 사려 하지 않았다. 당연히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진호는 자유롭지 못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진호는 세상의 규칙들을 비웃고 조롱할 수 있었다. 선화는 진호의 세 번째 작품인 '금이 간 어항' 의 한 문장 - '금붕어는 더 넓고 새로운 세상을 원치 않는다. 금붕어는 단지 자그마한 어항 속에서 찰나의 과거를 망각하며 언제나 세상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를 원할 따름이다.' - 을 읽고서는 수소문하여 진호를 찾았고,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하게 되었다. 선화의 눈에 비친 진호는 지상에 추락하여 날개를 꺾이고 만 천사였다.
그들은 가장 좋은 호텔 대신, 가장 후미진 곳에 있는 가장 허름한 여인숙에서 종종 함께 밤을 지새웠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부자리와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좁은 공간, 천박함이 감도는 공기가 그녀에게는 불쾌함이 아닌 성적 환상을 일으켰다.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저릿한 쾌감을 주었던 것이다. 진호 역시 상류층의 분위기를 풍기는 선화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아니, 마다하기는커녕, 새 작품의 주인공으로 그녀의 이름과 성격을 사용하고 싶다고까지 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으나, 선화는 인륜을 저버리면서도 짐짓 당당한 진호의 태도가 좋았다. 언제나 정직한 남편은 올곧은 직언으로 그녀의 마음을 헝클어 놓을 때가 있었지만, 진호의 거짓말과 사탕 발린 말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다. "나의 부서진 틈새들을 메워 줄 당신이 필요해." 라는 진호의 속삭임을 들을 때 마다, 선화는 아랫배가 팽팽하게 당겨 오는 듯 했다.
그들의 관계가 발각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마따나 지나치게 깊이 빠졌던 것이다. 그녀는 결국 동전 한 닢 못 쥔 채로 이혼을 당했고,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 실상은 이웃들 보기가 창피하다는 이유로 - 친정으로 돌아가지도 못 했다. 화려했던 그녀의 생활은 당장 하루, 하루를 전전긍긍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진호마저 그녀를 버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진지한 사랑은 아니었다지만, 진호는 돈 때문에 누군가를 사귀거나 버리는 부류의 남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선화는 한동안 진호의 방에서 지냈다. 그러나 지난 수 년 동안 가정부의 손에 모든 내조를 맡겨 왔던 그녀가 갑작스레 청소며 설거지 같은 일들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마치 예쁘장한 인형처럼 조용히 앉아서 진호의 옛 작품들을 읽으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다.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그녀를 보다 못 한 진호는 그나마 생기가 감도는 시장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선화는 보기에 좋은 것들만 골라서 담았다. 큼직하고 매끈한 오이, 눈처럼 하얀 두부, 먼지도 미끄러질 듯이 깨끗한 사과, 잔뿌리 하나 없는 당근... 혼자서 거칠게 살아 온 진호의 눈에는 그녀가 고른 것들 전부가 농약 범벅으로 보였다.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나쁜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들. 그것은 선화가 살아 온 지난 세월들의 한 단면과도 같았다. 진호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에게 선화는 더 이상 스쳐 가는 가벼운 인연이 아니었으므로.
그녀가 깨끗하고 굵직한 감자 한 알을 집어 들었을 때, 진호는 부드럽게 말했다.
"감자는 약간 작고 지저분한 게 더 맛있어."
"정말? 그래도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잖아."
선화는 감자를 이리, 저리 돌려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 말 믿어 봐. 먹어 보면 안다니까."
"왜 그럴까? 잘 자랐으니까 좋은 거 아냐?"
"있잖아."
"응."
"뭐든지 조금씩 흠집이 있는 게 더 맛있고, 예쁘고, 정이 간다. 감자도 마찬가지고. 이 험한 세상에서 상처 하나 없이 여태껏 버텼다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음, 그럴싸한 논리야."
마침내 그녀는 수긍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을 하는 눈치더니, 싹이 터 옅게 녹색으로 변한 감자, 크게 파이거나 찍힌 자국이 있는 감자, 거무튀튀하게 썩은 흔적이 있는 감자 몇 알을 골라서 봉지에 담았다. 억지로, 일부러 못난 것들만 고른 기색이 역력해서, 진호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다듬다 보면 버려야 할 부분이 먹을 수 있는 부분보다 훨씬 많았다.
"나, 깨달은 게 있어."
그 날 밤, 선화는 진호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하게 됐는지 알 것 같아."



